발표한 시 77

첫사랑

첫사랑 젊은 날 내 맘을 사로잡은 그리운 이여 사랑이란 말이 숙성되면 네게 보내려 했다 그러나 보낸 적이 없다 아니 보낼 수 없었다 네 눈빛만 보면 사랑이란 말이 뇌리에서 사라지고 복사꽃 향기만이 텅 빈 가슴을 채워 내 혀가 화석처럼 굳어 버렸기 때문이다 하지 못한 사랑이란 말 내 가슴속에서 아직도 네게로 향한 채 팽팽히 당겨진 활시위처럼 긴장하고 있다네. [월간 문예사조 2021년 11월호]

발표한 시 2021.11.02

상사화

상사화 한 철 싱싱하던 푸른 잎사귀 가뭇없이 사라진 자리 뾰조롬히 싹 내밀고 조금씩 키를 키우던 여린 꽃대궁 잎을 향한 연정 절정으로 치닫는지 꽃봉오리 하나 붉은 속살로 부풀어 올라 몸을 푸는 중이다 잎은 꽃을 보지 못하고 꽃은 잎을 만나지 못하는 애틋한 운명 명치에서 목젖까지 그리움이 차올라 울컥하는지 꽃대궁 목을 빼고 산들바람에 두리번거린다 꽃송이 속 길게 뻗은 꽃술에서 왈칵 쏟아내는 비늘줄기 속 그리움의 시간들 이룰 수 없는 사랑, 가슴앓이여 붉은 꽃잎에 잎잎이 스미었구나 이제 만날 수 없는 옛집 장독대 옆 작은 꽃밭 그리운 얼굴들 그 꽃밭에 피던 어여쁜 상사화 피어 상사화 뜻 몰라도 예쁘기만 하던 어린 시절로 어느새 꿈결인 듯 돌아가 있네. [詩하늘 2022가을 107호]

발표한 시 2021.08.17

친구 생각

친구 생각 멀어진 거리만큼 소식 멀어진 내 오랜 친구여! 시시때때로 생각나는 그리운 친구여 까만 얼굴 하얀 치아 반짝이며 산으로 들로 온종일 즐겁던 친구여 어린날 세월 지나도 변치 않을 깊은 우정 가슴에 새겼나 보다 이랑진 눈가 주름 더욱더 깊어졌어도 네 얼굴 네 목소리 어제인 듯 또렷이 떠오른다 한 해 동안 전화 한 통 없어도 마음속 보물인 듯 언제나 보고픈 친구여 친구도 혼자 있을 때 내 생각나는지 적막한 이 밤 더욱 보고 싶구나. [월간 문예사조 2021년11월호]

발표한 시 2021.03.22

석곡

석곡 석곡이 꽃잎 열고 미향을 보낸다 여섯 갈래 고운 꽃잎에 맑은 기운 담았다 알겠다 갓난아기 살갗 같은 여린 꽃잎 펴놓고 해맑게 마주 보자는 뜻 괜찮아 수만 가지 근심 걱정 잠시 잊어도 좋아 꿀샘 깊숙한 곳에서 피워 올린 향기에 좀 더 가까워지는 사이 노포동 난농원 네 가녀린 모습에 돌아서다 품은 인연 해마다 새 줄기 세우고 묵은 줄기 말리며 교감한 지 어언 삼십 년 나의 지기 석곡 세월 흘러도 너를 향한 첫 마음 그대로이다. [시하늘 105호 2022 봄]

발표한 시 2021.02.28

연리지(連理枝) 사랑

연리지(連理枝) 사랑 나는 보았네 한몸인 듯 부둥켜안고 한뉘를 약속한 연인(戀人)울 나는 느끼네 징한 연인의 심장박동 소리를 결과 결을 맞대고 서로를 위무(慰撫)하는 몸짓 같은 땅을 딛고, 같은 하늘을 이고서 한 생을 다정히 살아갈 연인을 보네 비바람 휘몰아치는 날이면 어떠랴 눈보라 휘몰아치는 날이면 어떠랴 마주 보는 눈빛은 봄볕보다 포근하리 마주 잡은 두 손은 쇠사슬보다 견고하리 하늘이 둘로 갈라 놓을 때까지 잡은 손 놓지 않을 연리지 사랑아.

발표한 시 2020.10.18

몽상가 일기

몽상가 일기 몽상가는 몽상가 나무가 눈을 틔우고 또 다른 분신을 만들어 가듯 파도가 파도를 만들어 백사장 무덤으로 들어간 뒤 사랑이 사랑을 낳고 미움이 미움을 키우는 동안 슬픔이 슬픔을 낳고 걱정이 걱정을 키우는 동안 생각에 생각을 쌓아 올리다 무너지는 생각들이 갯바위 앞에서 소용돌이치는 오후 1시 개울을 건넌 고양이가 젖은 털을 말리며 가죽 목걸이를 한 강아지를 향해 머리를 갸웃거린다 쓰레기통을 뒤지던 우울한 생각에 젖어 있을까 생각이 거미줄에 걸린 바람처럼 흔들리며 몽상 속으로 깊숙히, 깊숙히 빠져드는 저녁, 어제처럼 먼 산이 어둠에 잠기고 벼린 칼날 같은 자동차의 눈알들이 어둠을 뚫고 무수히 돋아나 검은 밤을 베고 있다.

발표한 시 2020.10.18

고사리

고사리 몇 뼘 되지 않은 꽃밭에 심어둔 고사리가 어린순을 내밀었다 가는바람에도 꺾어질 듯 흔들리며 한나절 이리 비틀고 저리 비틀며 키를 키운다 아침에 물 주고 저녁에 들여다보는 성급한 마음 나무라기라도 하듯 기다리라 눈짓하는 어린 고사리 바람의 운율에 몸을 맡기고 빛의 향방을 따라 조금씩 내공을 쌓는 저 몸짓 어쩌면 어린 몸이 저리도 형형할까 기우는 하늘을 떠받치려는 듯 꼭 쥔 두 손 조금씩 펴는 어린 고사리 우리도 저토록 싱싱한 날 있었을 게다.

발표한 시 2020.1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