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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다페스트의 해바라기/최경숙

부다페스트의 해바라기/최경숙 부다페스트를 향해 자동차로 달리다 수천만 평의 해바라기 밭을 만났다 다뉴브강 푸른 물을 마시고 자란 키 작은 해바라기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이 노란 유치원복을 입은 꼬맹이들 같다 까맣게 익은 씨가 바람에 산들거릴 때마다 아이들의 뒤통수를 보았다 재잘거림도 들렸다 수천 명이 노란 원복을 입고 선생님의 구령에 맞춰 서투른 몸짓으로 앞으로 나란히를 하고 있었다 [부다페스트 해바라기, 최경숙 시집, 2021년, 시담]

첫사랑

첫사랑 젊은 날 내 맘을 사로잡은 그리운 이여 사랑이란 말이 숙성되면 네게 보내려 했다 그러나 보낸 적이 없다 아니 보낼 수 없었다 네 눈빛만 보면 사랑이란 말이 뇌리에서 사라지고 복사꽃 향기만이 텅 빈 가슴을 채워 내 혀가 화석처럼 굳어 버렸기 때문이다 하지 못한 사랑이란 말 내 가슴속에서 아직도 네게로 향한 채 팽팽히 당겨진 활시위처럼 긴장하고 있다네. [월간 문예사조 2021년 11월호]

발표한 시 2021.11.02

상사화

상사화 한 철 싱싱하던 푸른 잎사귀 가뭇없이 사라진 자리 뾰조롬히 싹 내밀고 조금씩 키를 키우던 여린 꽃대궁 잎을 향한 연정 절정으로 치닫는지 꽃봉오리 하나 붉은 속살로 부풀어 올라 몸을 푸는 중이다 잎은 꽃을 보지 못하고 꽃은 잎을 만나지 못하는 애틋한 운명 명치에서 목젖까지 그리움이 차올라 울컥하는지 꽃대궁 목을 빼고 산들바람에 두리번거린다 꽃송이 속 길게 뻗은 꽃술에서 왈칵 쏟아내는 비늘줄기 속 그리움의 시간들 이룰 수 없는 사랑, 가슴앓이여 붉은 꽃잎에 잎잎이 스미었구나 이제 만날 수 없는 옛집 장독대 옆 작은 꽃밭 그리운 얼굴들 그 꽃밭에 피던 어여쁜 상사화 피어 상사화 뜻 몰라도 예쁘기만 하던 어린 시절로 어느새 꿈결인 듯 돌아가 있네. [詩하늘 2022가을 107호]

발표한 시 2021.08.17

고향 내게로 이어진 정든 길이여

흰구름 떠 가면 구름과 함께 나직한 바람 스치면 바람과 함께 이길 아련히 되돌아 가면 느티나무, 떡갈나무, 갈대꽃에 싸여 우리가 태어나고 자란 조그만 마을 벼 이삭 고개 숙인 논두렁 따라 잠자리, 메뚜기 쫓아 설레던 벗들 함께 얼큰한 동동주에 도타운 안부 나누면 무엇이던 푸짐하게 꿈이 되는 옛날이여 바람만 살랑여도 싸립문 밖 내다 보며 안타까이 나를 기다리는 얼굴, 붉은 홍시 탐스런 뒷 마당 감나무 이켠으로 넌지시 길다란 가지 뻗어 온갖 것 접어두고 오라 하는데 --- 가서, 풍년가 술렁이는 들판에 서면 달빛처럼 화안히 열려 오는 고향, 다시 내게로 이어지는 정든 길이여 고향, 내게로 이어지는 정든 길이여 흰구름 떠 가면 구름. [담은 글 작자미상] *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생활하는 사람은 누구나 기억 ..

고향을 그리는 마음에 봄은 더 따사롭다.

고향을 그리는 마음에 봄은 더 따사롭다. 한가로이 마음을 비우고 눈을 감으면 문득 기억 속에 낯 익은 고향 마을이 떠 오른다. 이런 봄날이면 수풀꼭대기로 초가지붕 위로 나지막히 다가온 하늘이, 그 하늘에서 내리 쬐는 나른한 햇살이 더욱 정겨웠다. 풀냄새, 땀냄새가 풀풀 피어 오르는 고향의 공기는 얼마나 순수하고 싱그러웠던가. 물도 순하여, 그 물에 밥짓고 몸 씻던 우리 시골 사람의 인심은 아낙도 사내도 욕심없이 곱기만 했지 그리고 너그러운 고향의 품에서 천둥 벌거숭이 소년이 바람 결에 띄워 보던 때 없는 꿈이, 청춘의 맹세가 아직도 가슴에서 설레여 맴도는 것을 --- 세월이 흘러, 이제 나는 이곳에 너는 저곳에 멀리 흩어져 서로 낯설어 졌어도, 희미한 추억속에 고향을 그리는 마음에서는 옛 모습 변함 없는..

고향의 보리밭 살폿한 향기여

칡 넝물과 소나무로 우거진 산구비를 꺽어 들면 동구나무가 팔 벌려 반기는 호젓한 고향 마을 싸립문 밖으로 벌 나비 잉잉 날아 다니고 보리내음 싸아한 들길에 서노라면 이랑마다 종다리의 고운 목청이 감돌아와 댕기 딴 누이들 김매던 모습이 눈에 선하고 쉼 참에 깜부기 뽑아 불던 보리 피리 소리 필릴리 필릴릴리 필릴릴리 필리리 그리운 가락따라 옛생각이 아련히 피어 오른다. 개구장이 숯 깜장이 동갑네기 또래들 진달래 꽃묶음으로 얼굴을 가리고 보리밭에 숨어서 꽃 줄께 이리온 ---- 문둥이 흉내로 쑥캐던 계집애들 화들짝 놀래키고 허리춤의 책보도 팽개쳐 둔 채 가재잡이, 새알털이로 달리고 딩굴다가 똥장군 푼 동네 어른 쇠죽 쑤러 돌아 가며 어서 집에 들어 가라 나무라실 때 까지 긴긴 하루해가 아쉬웠던 산 그늘 지금도..

친구 생각

친구 생각 멀어진 거리만큼 소식 멀어진 내 오랜 친구여! 시시때때로 생각나는 그리운 친구여 까만 얼굴 하얀 치아 반짝이며 산으로 들로 온종일 즐겁던 친구여 어린날 세월 지나도 변치 않을 깊은 우정 가슴에 새겼나 보다 이랑진 눈가 주름 더욱더 깊어졌어도 네 얼굴 네 목소리 어제인 듯 또렷이 떠오른다 한 해 동안 전화 한 통 없어도 마음속 보물인 듯 언제나 보고픈 친구여 친구도 혼자 있을 때 내 생각나는지 적막한 이 밤 더욱 보고 싶구나. [월간 문예사조 2021년11월호]

발표한 시 2021.03.22

석곡

석곡 석곡이 꽃잎 열고 미향을 보낸다 여섯 갈래 고운 꽃잎에 맑은 기운 담았다 알겠다 갓난아기 살갗 같은 여린 꽃잎 펴놓고 해맑게 마주 보자는 뜻 괜찮아 수만 가지 근심 걱정 잠시 잊어도 좋아 꿀샘 깊숙한 곳에서 피워 올린 향기에 좀 더 가까워지는 사이 노포동 난농원 네 가녀린 모습에 돌아서다 품은 인연 해마다 새 줄기 세우고 묵은 줄기 말리며 교감한 지 어언 삼십 년 나의 지기 석곡 세월 흘러도 너를 향한 첫 마음 그대로이다. [시하늘 105호 2022 봄]

발표한 시 2021.0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