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고 싶은 시 37

부다페스트의 해바라기/최경숙

부다페스트의 해바라기/최경숙 부다페스트를 향해 자동차로 달리다 수천만 평의 해바라기 밭을 만났다 다뉴브강 푸른 물을 마시고 자란 키 작은 해바라기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이 노란 유치원복을 입은 꼬맹이들 같다 까맣게 익은 씨가 바람에 산들거릴 때마다 아이들의 뒤통수를 보았다 재잘거림도 들렸다 수천 명이 노란 원복을 입고 선생님의 구령에 맞춰 서투른 몸짓으로 앞으로 나란히를 하고 있었다 [부다페스트 해바라기, 최경숙 시집, 2021년, 시담]

고향 내게로 이어진 정든 길이여

흰구름 떠 가면 구름과 함께 나직한 바람 스치면 바람과 함께 이길 아련히 되돌아 가면 느티나무, 떡갈나무, 갈대꽃에 싸여 우리가 태어나고 자란 조그만 마을 벼 이삭 고개 숙인 논두렁 따라 잠자리, 메뚜기 쫓아 설레던 벗들 함께 얼큰한 동동주에 도타운 안부 나누면 무엇이던 푸짐하게 꿈이 되는 옛날이여 바람만 살랑여도 싸립문 밖 내다 보며 안타까이 나를 기다리는 얼굴, 붉은 홍시 탐스런 뒷 마당 감나무 이켠으로 넌지시 길다란 가지 뻗어 온갖 것 접어두고 오라 하는데 --- 가서, 풍년가 술렁이는 들판에 서면 달빛처럼 화안히 열려 오는 고향, 다시 내게로 이어지는 정든 길이여 고향, 내게로 이어지는 정든 길이여 흰구름 떠 가면 구름. [담은 글 작자미상] *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생활하는 사람은 누구나 기억 ..

고향을 그리는 마음에 봄은 더 따사롭다.

고향을 그리는 마음에 봄은 더 따사롭다. 한가로이 마음을 비우고 눈을 감으면 문득 기억 속에 낯 익은 고향 마을이 떠 오른다. 이런 봄날이면 수풀꼭대기로 초가지붕 위로 나지막히 다가온 하늘이, 그 하늘에서 내리 쬐는 나른한 햇살이 더욱 정겨웠다. 풀냄새, 땀냄새가 풀풀 피어 오르는 고향의 공기는 얼마나 순수하고 싱그러웠던가. 물도 순하여, 그 물에 밥짓고 몸 씻던 우리 시골 사람의 인심은 아낙도 사내도 욕심없이 곱기만 했지 그리고 너그러운 고향의 품에서 천둥 벌거숭이 소년이 바람 결에 띄워 보던 때 없는 꿈이, 청춘의 맹세가 아직도 가슴에서 설레여 맴도는 것을 --- 세월이 흘러, 이제 나는 이곳에 너는 저곳에 멀리 흩어져 서로 낯설어 졌어도, 희미한 추억속에 고향을 그리는 마음에서는 옛 모습 변함 없는..

고향의 보리밭 살폿한 향기여

칡 넝물과 소나무로 우거진 산구비를 꺽어 들면 동구나무가 팔 벌려 반기는 호젓한 고향 마을 싸립문 밖으로 벌 나비 잉잉 날아 다니고 보리내음 싸아한 들길에 서노라면 이랑마다 종다리의 고운 목청이 감돌아와 댕기 딴 누이들 김매던 모습이 눈에 선하고 쉼 참에 깜부기 뽑아 불던 보리 피리 소리 필릴리 필릴릴리 필릴릴리 필리리 그리운 가락따라 옛생각이 아련히 피어 오른다. 개구장이 숯 깜장이 동갑네기 또래들 진달래 꽃묶음으로 얼굴을 가리고 보리밭에 숨어서 꽃 줄께 이리온 ---- 문둥이 흉내로 쑥캐던 계집애들 화들짝 놀래키고 허리춤의 책보도 팽개쳐 둔 채 가재잡이, 새알털이로 달리고 딩굴다가 똥장군 푼 동네 어른 쇠죽 쑤러 돌아 가며 어서 집에 들어 가라 나무라실 때 까지 긴긴 하루해가 아쉬웠던 산 그늘 지금도..

그 바다에 가고 싶다/박창기

그 바다에 가고 싶다 바라지 않아도 저 홀로 출렁이다 멀리서 온 강물을 뜨거운 가슴으로 맞이하는 그 바다에 가고 싶다 우리는 모두 너무 기다렸다 기약할 수 없는 신기루들을 마냥 기다렸다 바다가 우리를 기다렸던 건 우리의 기다림만이 아니라 우리의 추억이었다 저 홀로 길을 내어 흘러가는 강물을 보라 추억이 함께 흐르지 않고서야 먼 길을 에돌아왔겠느냐 그리움에 목이 마르지 않고서야 샛 강물들을 불러 보았겠느냐 강물이 바다를 만나 마음껏 출렁이는 건 기쁨의 손뼉이다 기쁨의 광휘가 저물고 나면 추억은 되살아난다 추억 안아 들어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는 그 바다에 가고 싶다 [따뜻한 흉터 박창기 시선집 두엄 2014년]

늘 내 곁에/강명화

늘 내 곁에 언제나 옆에 있어 편안한 사람 보고 있으면 서로 다 알까 마는 함께 있음으로 인연의 끈을 또 엮는다 소낙비 아닌 단비 같은 그리움 계절 따라나서고 비 온 뒤 한적한 숲 속을 거닐 때도 지금처럼 바다가 보이는 창가에서 따뜻한 햇볕이 나를 껴안을 때도 언제나 물끄러미 지켜보며 미소 짓는 그 사람 늘 내 곁에 있음을 [여백을 기다리며 강명화 시집 두레문학 2020년]

회오라비 꽃/박정애

회오라비 꽃/박정애 하찮은 풀 한 포기에도 아득한 시원이 있어 그대가 이처럼 쾌청한 천공을 향해 생각의 볏을 치세우고 꽃대를 밀어 올리고 첫 날개를 펼치는 순간, 무한 억겁의 바다에 천뢰가 울고 소리란 소리는 모두 안고 울먹거리는 하늘 끝 수평선을 흔들었을 것인데 천년설산을 건너온 저 바위의 침묵에도 가슴에 품은 말들이 꽃으로 피어나 꽃이라 부르지 않아도 꽃인 것을 다만 너만 모른다는 것 눈물로 가득 찬 천공을 새들만이 누리는 은둔의 낙원이었을까 새들도 영혼과 만나고 싶었을까 새들의 몸은 가볍지만 주검은 무거워 땅위에 내려놓은 그 주검에서 일어나 새의 혼신으로 핀 너를 꽃이라 불렀음에도 끝내는 날아갈 아슬아슬한 난간 위에서 웅비의 용력을 쓰는 하얀 새 조용한 지구 여린 꽃대 끝에서 청결한 냉정을 잃지 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