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깜빡이는 이름

깜빡이는 이름 치매 병실을 밝히던 형광등이 자주 깜빡거린다 형광등 가장자리가 거무스름하다 얼마나 오랜 날의 어둠을 밀어냈으면 제 속이 저렇듯 까맣게 타들어 갔을까 병원 원장이셨다는 분이 병실 바닥에 등걸처럼 쪼그려 앉아 계신다 입맛을 잃었다는 저분은 또 얼마나 많은 환자의 잃은 입맛을 찾아 주시다 자신의 입맛을 야금야금 잃어 갔을까 조금 전 했던 말을 잊어버리고 잊어버린 말을 찾느라 더 깊은 숲 속으로 몸을 숨기는 늙은 새처럼 망각의 골짜기 깊숙이 들어가신 저분 예리한 칼날에 베인 상처처럼 세월이 새긴 눈가의 주름이 깊다 뚝뚝 끊어지던 삭은 고무줄처럼 끊어져 갔을 그 많은 기억의 줄기 바람의 엉덩이를 걷어차던 땅거미 내리는 겨울 저녁때처럼 쓸쓸하게 이름마저 자주 깜빡하시는 슬금슬금 몰려오는 어둠의 적막...

발표한 시 2009.09.10

꿈 햇살 하얗게 찔레꽃잎에 쏟아지던 날 집에서 벗어난 거리만큼 꼭 그만큼 되돌아가는 길 서너 걸음 앞에서 칠보단장 번쩍이던 길앞잡이 가만히 손 내밀면 닿을 듯 닿을 듯하다가도 포록 포록 포로록 저만치 앞서 날던 길앞잡이 길 다 끝나도록 애타게 뒤만 쫓다 한 번도 나란히 걸어보지 못하고 어디론가 날아간 길앞잡이 지금도 유년에 본 금록적빛 영롱한 날개 아롱거리네. [한국문학방송(DSB)문인글방 작품선집 제2집 수록]

발표한 시 2009.01.11

저수지 안 축구공

저수지 안 축구공 저수지 안에 낡은 축구공이 한가로이 떠 있다 보물이라도 만난 듯 찬찬히 살펴보는데 실밥이 터져 가죽이 삐죽 불거져 있다 누군가의 발길질에 참 모질게도 차였던 모양이다 잔물결에도 욜랑욜랑 흔들리는 축구공 저수지 안에 들어와서야 저 혼자만의 느긋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나는 축구공 앞에 쪼그려 앉아 턱을 괴고 눈 감고도 훤히 그릴 수 있는 형편없었던 내 삶의 궤적을 쫓는다 그리고 아직 축구공 속에 남아있을 얼마간의 공기를 생각한다 축구공이 축구공일 수 있게 하는 마지막 공기 물속에선 새우들이 축구공을 톡톡 차면서 장난질이다. 김진환 [한국문학방송(DSB)문인글방 작품선집 제1집 '반딧불의 서정' 수록]

발표한 시 2008.07.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