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1/김경호 비 오는 날 1 비 오는 날 얼룩진 거리를 지나면 젖은 노래들이 흥청거린다 꽃집으로 젖은 꽃다발이 걸어 들어가고 있다 공중전화를 들고 젖은 목소리를 듣다가 젖은 노래를 부르다가 백화점 진열대 앞으로 젖은 구둣발이 둘러선다 우산을 든 아픈 모습들이 젖은 가슴을 풀어헤치고 젖은 .. 다시 읽고 싶은 시 2012.04.03
묵시록默示錄/강민수 묵시록默示錄 -비석碑石 강민수 몸의 언어로, 다 하지 못한 말 차마 할 수 없어서 가슴에 새긴 말 정녕 살아서는 욕망하지 못하는 죽어서야 갖는 훈장 깃발이다 바람이 수시로 내 빈방을 다녀가고 작은 꽃들 지천으로 핀다 이전에 듣지 못한 바람 박힌 갈대항아리 그 빗살무늬소릴 다 듣.. 다시 읽고 싶은 시 2012.04.03
분수(噴水)는/김시종 분수(噴水)는 김시종 시(詩)가 마다하는 동전을 분수(噴水)는 넙죽넙죽 받아 먹는다 분수 밑에 소복히 쌓인 동전 가난한 시인이 주워 갔으면 시인이 동전을 주워간다면 동전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시가 태어날텐데. [문예사조 2011년7월호에서 담음] 다시 읽고 싶은 시 2011.07.12
그림자/명세희 그림자 명세희 오늘도 조용히 뒤를 따라 나섭니다 저 앞에 있는 당신에게 부끄러움 들키기 싫어 조용히 뒤를 따릅니다 앞만 보고 가는 당신이 어쩌면 야속하기만 합니다 뒤를 돌아봐주지 않는 당신이 서운하기만 합니다 당신의 분신에게 손을 뻗어 어루만져 보고 머릿결을 매만져 보고 천하장사 부럽.. 다시 읽고 싶은 시 2011.07.12
드럼/이혜성 드럼 이혜성 둥근 통과 금 접시들이 한데 모여 합체로봇처럼 하나의 악기를 이룬다 비슷하게 생긴 통, 접시들이 내는 하나하나 다른 소리들 쉴새없이 맞고 또 맞으면서도 나 옆엔 너, 너 옆엔 나 다닥다닥 붙어 앉아 서로가 서로의 아픔을 감싸고 신음을 보덤어 소리를 만든다 한이 맺혀야 소리가 난다.. 다시 읽고 싶은 시 2011.07.12
첫사랑 첫사랑 내 가슴 한쪽이 늘 비어 있는 것은 깨어졌어도 빛을 되쏘던 거울 같은 그대 따라나선 마음 하나 여태 돌아오지 않은 까닭이다. 기억 저편 유성의 잔상처럼 그대 곁 떠도는 마음 하나 돌아올 시간 잊은 지 오래 하지만 섭섭하지는 않네. 김진환 [월간 문예사조 09년 9월] 발표한 시 2009.09.10
깜빡이는 이름 깜빡이는 이름 치매 병실을 밝히던 형광등이 자주 깜빡거린다 형광등 가장자리가 거무스름하다 얼마나 오랜 날의 어둠을 밀어냈으면 제 속이 저렇듯 까맣게 타들어 갔을까 병원 원장이셨다는 분이 병실 바닥에 등걸처럼 쪼그려 앉아 계신다 입맛을 잃었다는 저분은 또 얼마나 많은 환자의 잃은 입맛을 찾아 주시다 자신의 입맛을 야금야금 잃어 갔을까 조금 전 했던 말을 잊어버리고 잊어버린 말을 찾느라 더 깊은 숲 속으로 몸을 숨기는 늙은 새처럼 망각의 골짜기 깊숙이 들어가신 저분 예리한 칼날에 베인 상처처럼 세월이 새긴 눈가의 주름이 깊다 뚝뚝 끊어지던 삭은 고무줄처럼 끊어져 갔을 그 많은 기억의 줄기 바람의 엉덩이를 걷어차던 땅거미 내리는 겨울 저녁때처럼 쓸쓸하게 이름마저 자주 깜빡하시는 슬금슬금 몰려오는 어둠의 적막... 발표한 시 2009.09.10
꿈 꿈 햇살 하얗게 찔레꽃잎에 쏟아지던 날 집에서 벗어난 거리만큼 꼭 그만큼 되돌아가는 길 서너 걸음 앞에서 칠보단장 번쩍이던 길앞잡이 가만히 손 내밀면 닿을 듯 닿을 듯하다가도 포록 포록 포로록 저만치 앞서 날던 길앞잡이 길 다 끝나도록 애타게 뒤만 쫓다 한 번도 나란히 걸어보지 못하고 어디론가 날아간 길앞잡이 지금도 유년에 본 금록적빛 영롱한 날개 아롱거리네. [한국문학방송(DSB)문인글방 작품선집 제2집 수록] 발표한 시 2009.01.11
신비한 풍란의 탄생 신비한 풍란의 탄생 풍란 탄생의 신비한 과정을 지켜보면서 사진에 담았다. 풍란이 세상을 향해 꽃 대궁을 밀어올린다 꽃봉오리의 완성을 위해 결코 서두르는 법이 없다 세상 어느 뉘라서 저처럼 완전무결한 작품을 구상하고 조각할 수 있으랴 마침내 한 방울의 향기를 세상 밖으로 튕겨 내는 순간 생.. 사는 이야기 2008.07.23
저수지 안 축구공 저수지 안 축구공 저수지 안에 낡은 축구공이 한가로이 떠 있다 보물이라도 만난 듯 찬찬히 살펴보는데 실밥이 터져 가죽이 삐죽 불거져 있다 누군가의 발길질에 참 모질게도 차였던 모양이다 잔물결에도 욜랑욜랑 흔들리는 축구공 저수지 안에 들어와서야 저 혼자만의 느긋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나는 축구공 앞에 쪼그려 앉아 턱을 괴고 눈 감고도 훤히 그릴 수 있는 형편없었던 내 삶의 궤적을 쫓는다 그리고 아직 축구공 속에 남아있을 얼마간의 공기를 생각한다 축구공이 축구공일 수 있게 하는 마지막 공기 물속에선 새우들이 축구공을 톡톡 차면서 장난질이다. 김진환 [한국문학방송(DSB)문인글방 작품선집 제1집 '반딧불의 서정' 수록] 발표한 시 2008.07.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