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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다에 가고 싶다/박창기

그 바다에 가고 싶다 바라지 않아도 저 홀로 출렁이다 멀리서 온 강물을 뜨거운 가슴으로 맞이하는 그 바다에 가고 싶다 우리는 모두 너무 기다렸다 기약할 수 없는 신기루들을 마냥 기다렸다 바다가 우리를 기다렸던 건 우리의 기다림만이 아니라 우리의 추억이었다 저 홀로 길을 내어 흘러가는 강물을 보라 추억이 함께 흐르지 않고서야 먼 길을 에돌아왔겠느냐 그리움에 목이 마르지 않고서야 샛 강물들을 불러 보았겠느냐 강물이 바다를 만나 마음껏 출렁이는 건 기쁨의 손뼉이다 기쁨의 광휘가 저물고 나면 추억은 되살아난다 추억 안아 들어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는 그 바다에 가고 싶다 [따뜻한 흉터 박창기 시선집 두엄 2014년]

늘 내 곁에/강명화

늘 내 곁에 언제나 옆에 있어 편안한 사람 보고 있으면 서로 다 알까 마는 함께 있음으로 인연의 끈을 또 엮는다 소낙비 아닌 단비 같은 그리움 계절 따라나서고 비 온 뒤 한적한 숲 속을 거닐 때도 지금처럼 바다가 보이는 창가에서 따뜻한 햇볕이 나를 껴안을 때도 언제나 물끄러미 지켜보며 미소 짓는 그 사람 늘 내 곁에 있음을 [여백을 기다리며 강명화 시집 두레문학 2020년]

회오라비 꽃/박정애

회오라비 꽃/박정애 하찮은 풀 한 포기에도 아득한 시원이 있어 그대가 이처럼 쾌청한 천공을 향해 생각의 볏을 치세우고 꽃대를 밀어 올리고 첫 날개를 펼치는 순간, 무한 억겁의 바다에 천뢰가 울고 소리란 소리는 모두 안고 울먹거리는 하늘 끝 수평선을 흔들었을 것인데 천년설산을 건너온 저 바위의 침묵에도 가슴에 품은 말들이 꽃으로 피어나 꽃이라 부르지 않아도 꽃인 것을 다만 너만 모른다는 것 눈물로 가득 찬 천공을 새들만이 누리는 은둔의 낙원이었을까 새들도 영혼과 만나고 싶었을까 새들의 몸은 가볍지만 주검은 무거워 땅위에 내려놓은 그 주검에서 일어나 새의 혼신으로 핀 너를 꽃이라 불렀음에도 끝내는 날아갈 아슬아슬한 난간 위에서 웅비의 용력을 쓰는 하얀 새 조용한 지구 여린 꽃대 끝에서 청결한 냉정을 잃지 않..

연리지(連理枝) 사랑

연리지(連理枝) 사랑 나는 보았네 한몸인 듯 부둥켜안고 한뉘를 약속한 연인(戀人)울 나는 느끼네 징한 연인의 심장박동 소리를 결과 결을 맞대고 서로를 위무(慰撫)하는 몸짓 같은 땅을 딛고, 같은 하늘을 이고서 한 생을 다정히 살아갈 연인을 보네 비바람 휘몰아치는 날이면 어떠랴 눈보라 휘몰아치는 날이면 어떠랴 마주 보는 눈빛은 봄볕보다 포근하리 마주 잡은 두 손은 쇠사슬보다 견고하리 하늘이 둘로 갈라 놓을 때까지 잡은 손 놓지 않을 연리지 사랑아.

발표한 시 2020.10.18

몽상가 일기

몽상가 일기 몽상가는 몽상가 나무가 눈을 틔우고 또 다른 분신을 만들어 가듯 파도가 파도를 만들어 백사장 무덤으로 들어간 뒤 사랑이 사랑을 낳고 미움이 미움을 키우는 동안 슬픔이 슬픔을 낳고 걱정이 걱정을 키우는 동안 생각에 생각을 쌓아 올리다 무너지는 생각들이 갯바위 앞에서 소용돌이치는 오후 1시 개울을 건넌 고양이가 젖은 털을 말리며 가죽 목걸이를 한 강아지를 향해 머리를 갸웃거린다 쓰레기통을 뒤지던 우울한 생각에 젖어 있을까 생각이 거미줄에 걸린 바람처럼 흔들리며 몽상 속으로 깊숙히, 깊숙히 빠져드는 저녁, 어제처럼 먼 산이 어둠에 잠기고 벼린 칼날 같은 자동차의 눈알들이 어둠을 뚫고 무수히 돋아나 검은 밤을 베고 있다.

발표한 시 2020.10.18

고사리

고사리 몇 뼘 되지 않은 꽃밭에 심어둔 고사리가 어린순을 내밀었다 가는바람에도 꺾어질 듯 흔들리며 한나절 이리 비틀고 저리 비틀며 키를 키운다 아침에 물 주고 저녁에 들여다보는 성급한 마음 나무라기라도 하듯 기다리라 눈짓하는 어린 고사리 바람의 운율에 몸을 맡기고 빛의 향방을 따라 조금씩 내공을 쌓는 저 몸짓 어쩌면 어린 몸이 저리도 형형할까 기우는 하늘을 떠받치려는 듯 꼭 쥔 두 손 조금씩 펴는 어린 고사리 우리도 저토록 싱싱한 날 있었을 게다.

발표한 시 2020.1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