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불지 않는 날은
청보리의 수런거림도
제비꽃들의 웅얼거림도 없어
홀로 적막하다
나른한 햇살 아른거리는 타향의 들길
억새 덤불 속으로 한 떼의 구름을 몰고 다니던
바람이 잦아들었다
수만 번 허리 굽혀 올곧은 줄기 하나 세우려던 날들은
기억의 줄기를 거슬러 올라
빛 바랜 일기장의 글씨처럼 박혀 있을 뿐
명창이 되지 못한 아버지의 노래는 메마른 줄기로 서 있다
바람 불지 않아 적막한 날은
얼굴에 검버섯 피워 놓고 떠나간
바람의 기억을 잠시나마 잊어야지
그리하여 다시 땅 속에서 한평생
줄기 끝으로 물을 길어 올리는 잔뿌리처럼
가슴으로 부르던 아버지의 노래 따라 흥얼거리며
바람 부는 새날을 처음인 듯 맞을 일이다.
김진환
[월간 문예사조 2013년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