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한 시

달팽이

김진환 시인 2012. 12. 15. 09:47

달팽이

비 온 뒤 탱자나무 가시 사이를  
느릿느릿 기어가고 있는 달팽이 
손가락으로 길을 막으니 
익숙한 듯 망설임 없이 돌아서 간다

맹수처럼 무시무시한 이빨도,
독사처럼 치명적인 맹독도 없는 것이
맹수보다도,
독사보다도 여유로운 모습으로 

몰랑몰랑한 몸이 고물거린다 
홀로 가는 새로운 길
날 선 발톱이 없으면 어떤가? 
단단한 뿔이 없으면 또 어떤가? 

등 위에 집을 지고 
달팽이걸음으로 슬쩍 돌아서 가는
수많은 난관 헤쳐 왔을 여유로운 저 몸짓
담담한 마음이 아니면 어림없을 일이다.
 
[2012년 문예사조 사화집
문향이 샘솟는 뜨락 수록]